사진평론: 사진의 구조적 인식으로한 라캉디자인 -권해일 <꼼뿌레샤 Le rouleau compresseur> 20170831-20170912, 부산프랑스문화원ART SPACE
꼼뿌레샤 Le rouleau compresseur
롤러식 꼼뿌레샤는 공사 현장에서 땅을 다지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권해일 <꼼뿌레샤>의 이미지는 네모난 구획으로한 색면들이었다.
사진의 등장으로 회화는 대상의 이면을 찾아간다. 몬드리안은 대상을 단순화하여서 조형적 보편성을 추상한다.
확대된 사진은 구상과의 거리를 두지만 그것의 구체(具體)를 알 수 없다.
따라서 구체의 개념을 드러내지 못하는 추상적 무늬의 사진은 추상이 아니다.
이것은 무늬가 대상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표로서 꼼푸레샤가 다른 기표로서 몬드리안의 무늬로 대치되면서 원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치환하는 의미작용을 이루는 라캉적 디자인이다.
라캉적 디자인에서 <꼼뿌레샤>의 은유가 꼼뿌레샤를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표로서 꼼뿌레샤가 다른 기표로한 몬드리안의 무늬로 대치되면서 원래의 기표로서 꼼뿌레샤가 기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의 기의로서 꼼뿌레샤는 구획된 색면으로한 몬드리안적 추상의 사진처럼 보인다.
이것은 검정의 구획선이 없는 중성이어서 삼원색을 넘어선다. 그것은 형체를 분해한 화소가 되어서 이미지를 정한다.
네모난 화소를 확대한 <꼼뿌레샤>는 본디의 형체로한 실재를 확대하여서 몬드리안의 무늬를 넓히는 비추상이지만 라캉적 은유로서 꼼뿌레샤는 건축 현장에 대한 기의를 말한다.
그러나 보이는 공간은 구상적인 하나의 면이다. 이것은 보이는 대상의 시각적 조형이 기능한다. 그것은 구상적 형체를 유지에 따라 사진은 현실을 드러내는 의도로 남게 된다.
따라서 <꼼뿌레샤>에 대한 조형적 의미는 건축 현장의 인물에 머물게 됨으로써 추상적 의미가 제한한다.
몬드리안은 〈뉴욕 시 3〉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조형의 기능을 넘어서 공간과 대상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아간다.
이것의 추상적 의미작용은 기표로서 뉴욕의 빌딩이 다른 기표로서 캔버스에 컬러테이프로 연쇄되어서 몬드리안의 무의식으로한 ‘빈 공간’이 주체로써 의미가 되는 것이다.
뉴욕의 빌딩으로한 몬드리안의 〈뉴욕 시 3〉는 캔버스에 컬러테이프를 그가 원하는 비율로 구성한 추상이다.
이것은 구획선처럼 컬러테이프가 붙처저 있지만 왼쪽 상단에 노란 색의 구획 외에는 빈 구획들로 미완성된 그림이다.
이렇게 추상은 빈 공간이 된다.
라캉적 디자인으로한 ‘빈 공간’에 대한 기능은 동시적 기능과 공시적 기능이다.
이것은 동시적 기능은 문장의 의미가 소급적 효과에 의해 완성되고, 공시적 기능은 문장에 숨어 있어서 근원에서 얻을 수 있는 공시적 구조 즉 은유다.
그러나 평면적 이미지는 현상적 구조라서 그 구조의 의미를 공시적으로 은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권해일은 건축 현장의 바닥 면을 드러내어서 만들어질 공간에 대한 의미를 찾아간다.
그는 평면도처럼 리얼리티의 스트레이트 사진에 시각을 명확하게 하여서 그가 의도하는 실재에 대한 거울을 엿보게 한다.
바닥면이 구획된 이미지는 세워질 공간의 바닥이다. 이것은 선 공간에서 외부면이 될 빈 공간을 감추고 있다.
그가 의도하는 거울은 건축 현장과 그것의 행위로한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돌이킬 수 없이 행위의 영향을 받은 공간은 주체의 대상이 아니라 공간을 만드는 원인의 대상된다.
따라서 그가 실재하지않는 빈 공간을 추상화하여서 그것의 주체가 무의미한 것임을 말할 수 있는 원인적 대상은 없다.
노스탤지어의 빈 공간은 삶의 공간으로서 간절하게 기억되어서 시름한다.
이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 밖의 추상적 공간이다. 그것의 주체는 시간이 되어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건물이 주체가 된다.
건물을 세우는 현장은 빈 공간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않는다. 즉 빈 공간은 추상적 주체이지만 시간의 주관적 요구를 따라간다.
그리고 비주체로 한 공간은 건물로 보이지만 그의 환상은 공간에서 가치있는 주체를 실제화할 뿐이다. 그 실제를 사진으로 보이는 것은 선 존재할 건물을 구성하지 주체를 실제에 멈춰선다.
라캉의 환상적 구조에서 주체는 돌이킬 수 없는 표현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표현이 불가능 하여도 대상은 욕망의 원인이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외상적인 불가능성인 향유의 실재를 중심으로 구조화된다는 사실을 상징적 질서인 타자가 감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잠상과 같다.
그 잠상을 현상적으로 한 학습자로서의 사진은 상징적인 의미의 구조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그 현상의 구체적 틀 즉 인상을 찾을때 선 존재한 공간을 구성한다.
권해일은 건물을 세우는 현장에서 그 잠상을 찾지못하고 그 구조를 왜곡한다. 그리고 그는 주관적 공간으로 한 사진의 구조적 인식에서 추상적 주체가 아닌 선 공간에 실제의 멈춘 현상을 담는다.
글. 최철 주 (사진평 론가 & 문화디자인학박사)
사진 제공 : 정원일